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폐비 윤씨 (문단 편집) == 기타 == * 야사에 의하면 어느 날 대비가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가 반성을 뉘우치고 있는 중인지 내관을 보내 몰래 살펴보라고 명하여 내관이 폐비를 살펴보았는데 반성할 기미는 전혀 안보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곱게 단장을 하면서 재입궁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 폐비의 사사와 관련된 [[야사(역사)|야사]]가 하나 있다. 성종 때의 유명한 [[재상]]인 [[허종(조선)|허종]]과 허침 형제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궁궐]]로 가려던 도중에 누나의 집에 들렀는데 누나가 '''"[[선견지명|만약 어느 양반집 주인이 종들과 상의하여 부인을 내쫓았는데, 훗날 그의 아들이 주인이 된다면]] [[갑자사화|그 종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라고 말했다. 허종과 허침 형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는 누나[* 야사에 따르면 이 식견높은 누나는 100세까지 살아 사람들이 '100세 할머니'라고 불렀다 한다.]의 집을 나와서 계속 궁궐 쪽으로 [[말(동물)|말]]을 몰고 가다가 어느 다리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졌는데 낙상(落傷)을 핑계삼아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훗날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해 폐비의 사사에 동의했던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할 때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과 허침 형제는 숙청을 피해갔고 허종과 허침 형제가 일부러 굴러 떨어졌던 다리는 '종침교'라 불리게 되었다.[* [[야사(역사)|야사]]의 판본에 따라서는 허종만 말에서 굴러 떨어져 어전회의에 불참하고 허침은 참석했으며 그 자리에서 다른 신하들은 다 동의했는데 허침 혼자서만 이의를 제기했다가 좌천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종침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표석만 존재한다. 근처에 있는 종교교회가 종침교의 줄임말인 종교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허침이 윤씨의 폐비를 반대했음은 사실이며 허침은 왕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는데 세자가 공부를 게을리 해도 자상하게 타이르고 칭찬해 세자가 매우 좋아했다. 반대로 다른 스승 조지서는 늘 꾸짖고 "왕에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해 연산군이 싫어했다. 연산군이 벽에다 조지서는 [[소인배]]이고 허침은 군자라고 썼고 이 낙서를 조지서가 보고 불 같이 화를 냈다.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조지서는 세자를 심하게 나무랐고 이에 앙심을 품고 훗날 허침에게는 큰 상을 내렸지만 조지서는 트집을 잡아 죽였다.[* 정확히는 조지서는 [[갑자사화]] 국문 당시 비중한 몸이 결박을 당하자 숨이 막혀서 형장 3대를 맞고 죽어버렸는데 왕이 목을 베어서 [[효수]]하라고 한 것에 가깝다. 트집의 이유는 연산군 즉위 후 조지서가 올린 글에서 자신이 좀 더 잘 계도했다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인데 이걸 왕이 못 마땅해서 제 스스로 잘난 척하며 왕을 능멸했다고 죄명을 지었다. 어찌되었든 조지서 또한 갑자사화의 희생자여서 [[중종반정]] 이후 신원된다.] 아무튼 훗날 갑자사화에서 허종과 허침 형제가 모두 숙청을 피해갔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허침과는 달리 허종은 [[갑자사화]]가 벌어지기 전인 1494년(성종 25년)에 이미 사망했다.(허침은 1505년에 사망) 그래도 죽은 뒤에도 허종이 [[부관참시]] 등의 처벌을 받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폐비를 결정한 어전회의 때 두 형제가 불참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사유는 두 형제의 할머니 [[장례]] 때문이었다. 즉, 운 좋게 화를 면한 유형에 각색이 더해진 것.[*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허침의 졸기를 보면 늘 임금의 음황(淫荒)하고 정사가 문란하되 바로잡아 간하지 못함을 근심하더니 드디어 고질이 되어 병이 위독해졌으되 약을 들지 않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라고 하였다는 묘사가 나온다. [[사화]]로 인해 사람들이 대거 죽어나가는데 자신은 무사한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고 사관을 비롯한 당대 사람들도 허침에 대해 동정적으로 바라본 듯 하다.] * [[어우동]]의 죽음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끼쳤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는데, 왕이 한참 중전에게 시달리는 와중에 어우동이 갑톡튀하여 왕이 육성하고 있던 정치 유망주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켜버리자 왕이 간통죄로 다스리라는 신하들의 청도 씹고 유배를 보내고 1년이 지나자 강상죄로 처벌하여 교수형에 처하는 등 굉장히 지독하게 처벌을 내린 것이 스트레스로 인한 분풀이 의도도 섞여있는 거 아니냐는 내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